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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영민 - 기차는 지우개를 들고 간다 ​ ​

by 이구구299 2014. 10. 4.



기차는 지우개를 들고 간다

 

 

 박영민

 

 

 

저 흘려 쓴 풍경들,

어디서 많이 본 정든 필체 같아

너인 것만 같아

그러나 책장의 속력

두고두고 읽을 수 없다

어느 역 주변 두고 온,

체념마저 뺏기며 나는 살아가는가

떼어 놓은 간격만큼

스쳐온 슬픔 커지는 것을

나는 운명이 굴리는 잔머리라 되뇌이며

취해 간다

내가 너를 버린 게 아니다

너를 분실한 어디쯤 내 넋도 내려놓고

지정된 좌석에 으깨진 껍질 뿐인

육체는 무료하기 짝이 없다

거꾸로 열리는 어둠으로

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닫혀 간다

찐 달걀 같은 팍팍한 생의 목메임을

반쯤 남은 캔맥주로

꾸역꾸역 넘기는 동안

출발지와 도착지로 인쇄된

한 구절 묘비명 같은

구겨진 표 한 장 들여다

봐라, 아무리 너를 가졌다 한들

기적은 처음 선로에서부터 멀어져 간다

이 긴 봄밤도

붙잡고 싶은 순간 앞에선

무릎 꿇고 하찮게만 무너진다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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