기차는 지우개를 들고 간다
박영민
저 흘려 쓴 풍경들,
어디서 많이 본 정든 필체 같아
너인 것만 같아
그러나 책장의 속력
두고두고 읽을 수 없다
어느 역 주변 두고 온,
체념마저 뺏기며 나는 살아가는가
떼어 놓은 간격만큼
스쳐온 슬픔 커지는 것을
나는 운명이 굴리는 잔머리라 되뇌이며
취해 간다
내가 너를 버린 게 아니다
너를 분실한 어디쯤 내 넋도 내려놓고
지정된 좌석에 으깨진 껍질 뿐인
육체는 무료하기 짝이 없다
거꾸로 열리는 어둠으로
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닫혀 간다
찐 달걀 같은 팍팍한 생의 목메임을
반쯤 남은 캔맥주로
꾸역꾸역 넘기는 동안
출발지와 도착지로 인쇄된
한 구절 묘비명 같은
구겨진 표 한 장 들여다
봐라, 아무리 너를 가졌다 한들
기적은 처음 선로에서부터 멀어져 간다
이 긴 봄밤도
붙잡고 싶은 순간 앞에선
무릎 꿇고 하찮게만 무너진다
[출처] [박영민]기차는 지우개를 들고 간다|작성자 몽당연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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